이동 삭제 역사 ACL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r1 문단 편집) [오류!]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기울임취소선링크파일각주틀 == 여담 == 물리학자치곤 수학이 꽤나 약해 주변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야했다거나, 그가 초기에 내놓은 이론에 나오는 공식 계산은 전부 아내인 밀레바가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술했듯 그녀와 아인슈타인은 같은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이 때문인지 광양자 이론은 둘이 공동 연구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실제로 스위스 베른 소재 아인슈타인 박물관의 전시물 중에는 아인슈타인이 그녀의 공적을 훔친 거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는 사실이 소개되어 있으나, 초기 논문의 아인슈타인-마리치는 공동 저자를 표시한게 아니라 스위스의 관습적인 서명 방식(아내의 성을 뒤에 붙임)을 사용한 것이다는 등 반론도 많으며 학계에선 밀레바가 어떤 도움을 줬을 거라는 증거는 없다고 결론 지은 바 있다. 자세한 논박 내용은 한국어 위키피디아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문서나 밀레바 마리치 문서에 출처와 함께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여튼 이후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받은 후 그 상금을 이혼한 밀레바에게 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치고는''' 수학의 최신 분야를 못했다는거지, '''이미 중학교 때 미적분학 교재 풀던 사람이었다'''.(...) 이 부분은 2015년 5월 1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711311|다루었다]]. 거기다 '수학 및 물리학의 교사 과정'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학사학위를 받았으니 [[수학교육과]] 전공자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시험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가령, 부인 밀레바의 경우 끝내 졸업시험에서 떨어져 학위를 받지 못했다.] 대학교 시절엔 [[미적분학]]은 물론 [[대수학]], [[편미분방정식]] 등 10여개의 수학 과목을 수강하기도 하였다. 상대론에 대한 연구를 할 때 그는 중력으로 휘어진 공간을 표현하지 못해 친구 수학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는 소위 말하는 비(非)유클리드 공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19세기 중반 베른하르트 리만이 제창하고 난 후 19세기 말에나 가야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졌고, 중력을 기술하는 데 필수적인 미분기하학과 텐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된 것은 1900년 전후로,[* 지금은 미분기하학은 [[수학과]] 3학년에서 배운다.] 당시만 해도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이 1916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쓴 논문에는 기하학에 익숙하지 않은 물리학자들을 위해 미분기하학을 설명하는데 전체의 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엔 정립이 되는데 당시 수학으론 잘 표현하지 못한게 아니였을까란 소리도 있다-- 참고로 [[상대성 이론]]도 수학은 부인 밀레바의 도움을 받은거 아니냐는 설이 있는데, 상술했듯이 이 역시 가능성이 낮다. 광양자 이론 이후 아인슈타인은 그녀보다는 다른 동료들에게서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성 이론을 내놓을 즈음엔 밀레바는 그의 연구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사실, 밀레바는 졸업 시험의 수학 과목을 재수까지 하였으나 결국 통과하지 못해서 졸업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과 관련된 일화에 대해서는 Abraham Pais가 쓴 Einstein Lived Here(Oxford University Press, 1994)를 참고하기 바란다. 국내에도 번역서가 출판되었으나 역자가 비전공자인 관계로 과학 용어가 오역된 것이 많으니 주의할 것. 상술했듯 그의 대학 시절 수학 교수였던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수업을 자주 빼먹던 아인슈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아인슈타인은 게으른 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다만, 진심으로 싫어했던 건 아닌지 특수 상대론에도 기여를 했고 일반 상대론의 수학 파트는 민코프스키가 상당 부분을 담당했다. --수학 공밀레의 한 축에 스승도 포함시킨 아인슈타인-- [[양말]]의 효용성 낮음에 대해 불평하였는데,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발톱]]을 깎지 않아서 양말에 구멍이 자주 나서로 추측된다. '뇌에 전화 번호를 넣을 바에야 다른 지식을 넣는게 낫다'며 자신의 전화 번호도 적어두고 평생 기억하지 않는 일화도 있다. 전화 번호 가르쳐 달라고 할 때마다 일일이 수첩을 뒤적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노년엔 ~~치매~~자기 집 주소를 잊어버려서 비서격인 사람에게 주소 가르쳐달라고 전화를 했다는 말도 있다. 여동생인 마야가 말하기를 마야가 태어났을 때 함께 놀 수 있는 동생이 태어났다는 말을 두 살 때 들었다고 한다.[* 근데 아인슈타인은 4~5살 되기 전가지 말을 거의 못했다. 한국나이 6살 쯤에 말을 뗐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도 말을 더듬거려서 부모가 ""얘는 안되겠구나"" 하고 포기했었다. --근데 말을 알아듣는건 어릴때도 되었나보다.-- --말은 들으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동생을 처음 보았을 때 '''바퀴'''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옹알이 수준으로 말했을 듯-- 팽이로 동생의 머리에 구멍을 내려고 한 적도 있다. 마야 曰 ""'''천재 오빠를 둔 동생의 두개골은 단단해야 해요'''."" 한 번은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고 인기가 높아지게 되자 큰 강당 같은 곳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한 달 동안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회는 아인슈타인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운전 기사에게 자신과 비슷하게 분장을 하게 한 다음 ""어차피 저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말이 뭔 뜻인지 모를거니까 나보다 말재주 좋은 네가 강의해라""고 했고 운전 기사가 강의를 대신 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강의를 진행하다가 물리학 전공자가 질문을 걸어오면 ""이건 내 운전 기사도 풀 수 있는 문제다.""면서 운전 기사 복장을 하고 있던 진짜 아인슈타인을 불러내 문제를 풀게 했다고(...) 다른 판본에서는 운전 기사가 강연회에 함께 참석하다 보니 강의 내용을 잘 외우고 있어서 가능했다는 설도 있다. ~~물리학자 운전수 3년이면 상대성 이론을 읊는다~~ 예술 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모차르트의 곡을 선호했다고 한다. 평소의 취미 활동도 바이올린 연주와 [[요트]]를 타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곡들을 [[쾨헬 번호]]로 정리한 사람이 그의 6촌 지간인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이다. 한날은 외출을 나갔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서 코트 안에 감추고 모자가 비에 젖지 않게 했다고 한다. 이웃 사람이 그것을 보고 비오는데 왜 모자를 벗어서 머리까지 젖게 만드냐고 하자 ""머리를 감는게 모자를 세탁하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다""라고 답했다고. --왜 수긍이 되지-- ~~탈모는?~~ 자기 집의 식탁보로 머플러를 짰다면서 이웃집에 전화를 걸어서 자랑한 적도 있다고 한다. 천재는 곧 괴짜라는 편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래도 실제로는 이웃 초등학생의 수학 숙제를 도와주면서 소일거리를 하는 자상한 모습도 있었다고 한다. --본격 아인슈타인에게 과외받는 초등학생-- 하지만, 정작 그 초등학생은 아인슈타인을 저명한 물리학자가 아닌 그냥 친절한 이웃집 할아버지(...) 정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였다. 한국인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위인들 중에 ""어? 이 사람이 사회주의자였어?"" 하는 반응이 나오는 두 사람이 [[헬렌 켈러]]와 아인슈타인이다. 1949년 미국의 사회주의 저널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창간호에 유명한 글 ""왜 사회주의인가?""를 기고한 적이 있다. [[http://monthlyreview.org/2009/05/01/why-socialism|영어 전문]], [[http://imjohnny.egloos.com/2112507|번역문]]. 또 [[민족주의]]를 강하게 혐오했다. 아마도, [[나치 독일]] 시대를 보냈던 그는 [[전체주의]]적인 사상에 극도의 거부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인슈타인은 [[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인 종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하느님을 초월하고, 교리나 신학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를 모두 포함하면서, 자연과 정신 모두의 경험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감각에 기초를 둔 것이어야 한다. 불교가 이런 요구를 만족시키는 대답이다. 만일 현대 과학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곧 불교가 될 것이다.''' > >The religion of the future will be a cosmic religion. It should transcend personal God and avoid dogma and theology. Covering both the natural and the spiritual, it should be based on a religious sense arising from the experience of all things natural and spiritual as a meaningful unity. Buddhism answers this description. If there is any religion that could cope with modern scientific needs it would be Buddhism. [[바둑]]을 둘 줄 알았다고 한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일할 때 어떤 일본인에게서 배웠다고 하는데, 일본기원에서 아인슈타인의 초단을 인정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http://iqbaduk.com/xe/113284|#]] [[나무파일:external/image.hnol.net/201102111316417591-167450.jpg|width=480]][* 전해지는 바로는 아인슈타인이 이 사진은 반드시 유명해질 거라면서 일부러 저런 포즈를 취했다고 한다. 뭔가 괴짜 같은 과학자의 인상을 잘 표현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후일 NHK스페셜 '아인슈타인의 세계' 제작팀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원래는 자동차 뒷좌석에 세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을 아인슈타인 부분만 트리밍한 것이라고 한다. 모 행사를 마친 후 찌푸린 표정으로 차에 올라탄 아인슈타인을 보고 신문기자가 ""아인슈타인 박사님, 포즈라도 취해 주십시오!"" 하니까 저런 표정을 지은 것이라고.[br] [[나무파일:external/wmn.hu/Einstein-Frank-Aydelotte-and-wife-3.jpg]]][* 이 사진에 대해 [[학교대사전]]은 ""천재들은 왜 [[요절|일찍 죽을까]]? [[장수|안 죽고 오래 살면]] 노인 때 이런 사진이 남기 때문이리라""라고 평한 바 있다.(...) 그 예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im preview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함으로써, 사용자는 본인이 기여한 콘텐츠가 CC BY-NC-SA 2.0 KR에 따라 배포되며, 해당 콘텐츠에 대한 저작자 표시를 하이퍼링크나 URL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또한, 이 동의는 기여한 콘텐츠가 저장되고 배포된 이후에는 철회할 수 없음을 명확히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3.137.150.11)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